[역경의 열매] 신용원 (3) 마약에 찌들었던 시절 교회로 나를 이끈 어머니

폭력 사건으로 수배 된 후 약물 손대… 괴물 되어가는 아들 보며 상심 컸을 것

입력 2015-04-15 02:48
[역경의 열매] 신용원 (3) 마약에 찌들었던 시절 교회로 나를 이끈 어머니 기사의 사진
신용원 목사의 어머니 변보배 권사(오른쪽). 신 목사는 “어머니의 강직한 신앙과 기도가 나를 수렁에서 건져냈다”고 말했다.
처음에 마약을 접했을 때는 낙원을 경험하는 것 같겠지만 결국은 본인을 파괴시키게 된다. 약 기운으로 느끼는 쾌락은 일시적이며 약 기운이 빠지고 밀려오는 공허함은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다. 결국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다시 약을 찾게 되고, 그렇게 중독 상태가 심해진다. 중독의 사슬을 끊기란 세상 어떤 것보다 어려운 일이다. 때문에 마약에는 아예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폭력사건 수배자로 도피 생활을 하다가 그에 맞는 처벌을 받고, 다시 부천으로 돌아왔다. 약물에 손을 대고, 마약에 빠지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가만히 생각해 보니 ‘가난’에서 출발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얼른 돈을 벌자는 생각밖에 없었다. 친구들과 경매(競賣)일을 시작했다. 돈이 꽤 모이기 시작했다. 돈이 생기니 삶의 의욕이 생기면서 마약을 접하는 횟수도 줄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산경매를 하러 한 집에 찾아갔다. 가전제품들을 가지고 나오려는데 그 집의 꼬마가 울기 시작했다. 특히 책상을 들고 나오려고 하자 아이는 대성통곡을 했다. 그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가난 때문에 박탈감을 경험하는 그 아이가 처해 있는 상황이 과거 내가 겼었던 상황과 다를 바가 없었다. 결국은 경매라는 것이 사업 실패 등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부를 빼앗아 내가 부를 축적하는 일이었다. 충격을 받은 나는 아이의 책상을 포함해 그 집의 물건을 다 돌려주고 그날부터 경매일을 접었다.

경매일을 해서 모은 돈을 어떻게 불릴까 고민하다가 형님 사업에 투자하기로 했다. 건물을 관리하는 용역회사였다. 장남이자 장손인 형님은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일념 하에 사업에 매진하셨다. 나 역시 형님을 도와야겠다고 다짐했다. 자금 투자는 물론 건물 청소 일을 직접 하기로 했다. 신성한 노동을 통해 마약과 폭력으로 방황했던 시간, 편법과 탈법을 하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며 돈을 버는 일을 청산하겠다고 생각했다.

약 3년이 지나며 형님 사업은 자리를 잡아갔다. 부자는 아니지만 가난에 찌들어 살지도 않았다. 문제는 나였다. 내 안에 욕심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불쑥불쑥 차올랐다. ‘그저 청소용역 일이나 하며 내 인생은 여기서 주저앉는 것인가’라는 생각에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때를 노린 듯 유혹은 강력하게 찾아왔다. 나는 또 마약에 손을 댔다.

히로뽕과 헤로인 등 마약에 찌들어 있던 그 시절, 가장 마음 아팠을 사람은 바로 어머니였다. 남편이 죽고 이른 나이에 과부가 된 어머니는 상실감을 조금이라도 채워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막내아들이 괴물이 되어 가는 것을 보며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을 것이다. 어머니는 나에게 수시로 교회에 가자고 권하셨고, 나는 그때마다 짜증을 냈다. 성화에 못 이겨 어쩌다 교회에 나가도 어머니 몰래 예배 시작 전에 빠져 나왔다.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싫었다. 설교는 모두 거짓말 같았다. 어느 날은 교회에 가자고 다그치시는 어머니를 향해 “하나님이 있다면 교회에 헌신했던 아버지는 왜 그렇게 일찍 죽게 했으며 어머니는 왜 그렇게 힘들게 사느냐”며 “하나님은 없으니 정신 차리라”고 소리를 질렀다. 참으로 못된 아들이었다. 어머니는 우셨지만 나에게 확고하게 말씀하셨다. “하나님 은혜를 받아야 네가 산다.”

돌이켜 보면 어머니의 고집스럽고 강직한 성품이 고난과 환란 가운데서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나님마저 놓쳐 버리면 어머니는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035734&code=23111513&sid1=fai&sid2=0003 

[역경의 열매] 신용원 (2) “근본없는 아이” 놀림에 충격… 가출한 후 탈선

폭력배들과 어울려 본드 흡입·마약… 軍생활 적응못해 손가락 절단 자해

입력 2015-04-14 02:08
[역경의 열매] 신용원 (2) “근본없는 아이” 놀림에 충격… 가출한 후 탈선 기사의 사진
고등학교 1학년 시절 신용원 목사가 소풍 가는 버스 안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두뇌도 명석했고, 리더십도 있어 나름 따르는 친구들도 꽤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나는 자신감을 갖지 못했다. 친구 어머니로부터 “아버지도 없고 가정형편도 어려운 근본 없는 아이”라는 소리를 듣자 상대적 박탈감에 괴로워하던 나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방황과 탈선의 이유를 합리화해서는 안 되지만 나는 폭발한 열등감을 주체하지 못하고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힌 말 한마디가 내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것이다. 말은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

나 하나 바라보고 계신 어머니의 기대는 무거운 짐이었고, 집에서의 충돌도 잦아졌다. 아버지를 먼저 데려가신 하나님이 원망스러웠다. 결국 가출을 했다. 자연스레 불량한 친구들과 어울렸다. 또래 아이들에게 유명세를 탈 만큼 주먹질을 하고 다녔다. 당시 나는 힘이 좋아 씨름 선수로도 활동할 정도였다. 폭력의 주 대상은 부잣집 아이들이었다. 마음에 상처를 받은 것에 대한 보상심리로 작용해서 가정이 유복하다고 알려진 아이들을 심하게 괴롭혔다. 돌이켜 보면 너무도 미안한 마음뿐이다.

고등학교 1학년까지 모범생이던 나는 일탈을 하면서 걷잡을 수 없이 망가져 갔다. 약물에 처음 손을 댄 것도 그 즈음이다. 나와 같이 가출한 또래들과 모여 있던 아지트에서 본드 등을 흡입했다. 환각상태가 되면 괴로운 현실과 마음속의 방황에서 도망친 것 같이 느껴졌다. 당시 약물을 가장 가까운 친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추구해왔던 가치와 신념이 무너졌고, 마음의 공허함은 갈수록 커졌다. 탈선의 정도가 심해지자 학교에서도 퇴학을 당했다. 이후로 몇 학교를 옮겨 다녔다. 어머니가 받은 충격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내 마음을 돌리시려 부단히 애쓰셨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어리석은 생각이었지만 이미 내 인생은 끝이 났고 되돌리기엔 늦었다는 생각을 했다.

당연히 대학 진학은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동네 불량배들과 어울려 다니며 지냈고 약물흡입도 멈추지 않았다. 툭하면 패싸움에 휘말렸다. 결국 보다 못한 가족들은 나를 군대에 보내기로 했다. 마땅히 하는 일도 없었고, 늘 나 때문에 우시는 어머니에게 미안해 따르기로 했다. 당시 내 나이 20세였다. 하지만 내면에 회복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입대를 하자 견딜 수가 없었다. 어려서 장래희망이었던 육군 장성이 아니라 도피하다시피 입대한 내 현실이 원망스러웠다. 불과 4년 사이에 내가 너무 멀리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이 꺾였고, 꿈을 꿀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나를 더 깊은 수렁으로 밀어 넣었다. 군 생활을 잘할 리 없었다. 결국 적응을 못하고 6개월 만에 왼손 두 번째 손가락을 자르는 자해를 저질렀고, 난 불명예제대를 했다.

경기도 부천으로 돌아와서는 다시 폭력배 생활을 시작했다. 타락의 정도는 점차 심해졌다. 1986년쯤 규모가 큰 폭력사건에 관여를 했다가 지명수배령이 내려졌다. 강원도 원주로 도망을 갔다. 타향에 가서도 생활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외롭다는 생각에 그 지역 폭력배들과 어울리며 지냈고, 본드 등 약물을 넘어서 필로폰 등 더욱 심한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마약이라는 것은 결국 인간 스스로가 만든 인공낙원으로 쾌락과 타락의 끝이다.

나는 마약사범들의 자활교육을 할 때 마약을 선악과에 비유해 이야기한다. 보암직하고 먹음직했던 선악과를 먹으므로 해서 아담과 하와는 원죄를 저질렀고, 그들은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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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신용원 (1) 마약 중독자, 하나님 손길로 복음을 선물받다

신앙으로 심각한 중독 극복한 이후 17년째 약물 중독자들의 자활 도와

입력 2015-04-13 02:58
[역경의 열매] 신용원 (1) 마약 중독자, 하나님 손길로 복음을 선물받다 기사의 사진
신용원 목사(앞줄 왼쪽 두 번째)와 ‘소망을 나누는 사람들’ 회원들이 지난해 11월 워크숍을 마치고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나는 약물 등 중독자들의 자조·자활을 돕는 공동체인 ‘소망을 나누는 사람들’의 대표다. 우리 공동체는 매월 서울과 경기도 수원에 있는 구치소, 부산과 강원도 원주·춘천에 있는 교도소 등을 돌며 마약 사범들을 대상으로 치료재활교육을 한다. 마약사범 가족들을 위한 상담도 하고 있다.

이 사역을 올해까지 햇수로 17년째 지속하고 있다. 혹자는 사회에서 처절히 외면 받고, 남들이 기피하는 사람들을 돌보는 일이 힘들지 않느냐고 묻는다. 당연히 고된 일이다. 때로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나기도 한다. 하지만 감당해야 한다. 지금 내가 이렇게 삶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선물이기 때문이다.

나는 매우 심각한 마약 중독자였다. 마약 중독의 끝은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한때 그런 결정을 내리고, 실행하려 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순간 나를 찾아오셨다. 복음으로 중독을 극복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늘 나와 함께 계셨다. 이제부터 폭풍우와 같던 삶 가운데서 허덕이던 내게 따스한 손길을 내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나는 1965년 충북 보은에서 2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조부모님부터 3대째 이어온 크리스천 집안으로, 특히 어머니는 매우 엄격하게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이었다. 대표적인 일화가 하나 있다. 내가 일곱 살 때쯤이었다. 주일이었는데 친구들과 개울가에서 노는 것에 정신이 팔려 교회에 가지 않았다. 한참을 놀다 집에 왔더니 배가 고팠다. 밥을 달라고 했더니 어머니는 단호하게 안 된다고 하셨다. 교회에 가지 않은 것을 아시고 벌을 내리신 것이다. 어머니는 먹을 것을 장독대에 숨겨 두고 하루 종일 나를 굶기셨다. 그 충격이 너무 컸던지 그 이후로 난 교회 주일학교 6년을 개근했다.

아버지는 내가 아홉 살에 심장마비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목사님이 추우실까봐 매번 손수 장작을 패서 지게에 지고 교회에 가져다주실 정도로 헌신적인 분이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가세는 심하게 기울었다.

41세에 과부가 되신 어머니의 유일한 희망은 나였다. 난 항상 전교 1등을 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 어머니는 내가 판사나 검사가 되기를 바랐다. 내 장래 희망은 육군 장군이 되는 것이었다.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교감 선생님이 어머니께 “용원이를 큰 도시로 데려가 공부를 시켜야 한다”고 권유하셨다. 우리 가족은 경기도 부천으로 이사했다. 없는 살림이었지만 어머니는 집 평수를 줄이는 등 허리띠를 졸라매고 이사를 강행했다. 순전히 나의 교육 때문이었다.

부천고로 진학했다. 갑자기 바뀐 환경 탓에 적응하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릴 수는 없었다. 열심히 공부했고, 반에서 5등 정도의 성적을 유지했다. 겉으로는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사실 당시 나는 상당히 위축되어 있었다.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가난한 우리 집이 창피했다. 사춘기여서 더 민감했을지도 모른다. 어느 날 시험공부를 하기 위해 한 친구의 집에 갔다. 부유한 집이었다. 그 친구 어머니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내가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그분이 친구에게 한 말을 듣고 말았다. “넌 왜 하필 저렇게 아버지도 없고 가정형편도 어려운 근본 없는 애하고 어울리니?” 나의 열등감은 폭발했다.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032539&code=23111513


소망을 나누는 사람들의 사업으로 인천시가 행정자치부로부터 세출절감 부분 우수 사례로 선정된 뉴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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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경제 박흥서 기자] =인천시(시장 유정복)는 행정자치부가 개최한 ‘2014년 지방예산 효율화 우수사례 발표대회’에서 시의 ‘민간투자를 활용한 공공시설물 환경 개선사례’가 세출절감 부문 우수 사례로 선정돼 장관 표창 수상과 함께 2억원의 재정 인센티브를 확보하게 됐다고 밝혔다.

행정자치부에서는 지방예산 효율화 우수사례를 발굴·전파하기 위해 매년 경진대회를 실시하고 있다. 이번 대회에는 전국 지방자치단체에서 124건의 사례가 제출됐으며, 외부전문가로 구성된 심사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이중 29개 우수사례가 선정됐다.

시가 제출한 ‘민간투자를 활용한 공공시설물 환경 개선사례’는 가로환경을 저해하고 있던 불법·노후화된 가로판매대, 구두수선대를 정비하기 위해 표준디자인을 개발하고 민간투자 유치를 통한 무상교체로 저비용 고효율의 공공시설물 사업을 추진한 점이 높게 평가됐다.

시는 공공시설물에 대한 적극적인 민간참여를 유도해 가로판매대 92개소, 구두수선대 49개소 등 총 141개소를 인천광역시 공공시설물 표준디자인으로 교체했으며, 약 16억원의 민간투자를 이끌어내 예산절감에도 크게 기여했다.

이길주 도시경관과장은 “앞으로도 도시디자인 분야에 민간 참여 방안을 지속적으로 강구해 시 예산절감에 기여하는 것은 물론, 향후 유사 공공시설물의 보급 시에도 성공사례를 적극 활용하도록 유도하겠다”고 말했다.

 

http://www.ajunews.com/view/20150126094536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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