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신용원 (1) 마약 중독자, 하나님 손길로 복음을 선물받다

신앙으로 심각한 중독 극복한 이후 17년째 약물 중독자들의 자활 도와

입력 2015-04-13 02:58
[역경의 열매] 신용원 (1) 마약 중독자, 하나님 손길로 복음을 선물받다 기사의 사진
신용원 목사(앞줄 왼쪽 두 번째)와 ‘소망을 나누는 사람들’ 회원들이 지난해 11월 워크숍을 마치고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나는 약물 등 중독자들의 자조·자활을 돕는 공동체인 ‘소망을 나누는 사람들’의 대표다. 우리 공동체는 매월 서울과 경기도 수원에 있는 구치소, 부산과 강원도 원주·춘천에 있는 교도소 등을 돌며 마약 사범들을 대상으로 치료재활교육을 한다. 마약사범 가족들을 위한 상담도 하고 있다.

이 사역을 올해까지 햇수로 17년째 지속하고 있다. 혹자는 사회에서 처절히 외면 받고, 남들이 기피하는 사람들을 돌보는 일이 힘들지 않느냐고 묻는다. 당연히 고된 일이다. 때로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나기도 한다. 하지만 감당해야 한다. 지금 내가 이렇게 삶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선물이기 때문이다.

나는 매우 심각한 마약 중독자였다. 마약 중독의 끝은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한때 그런 결정을 내리고, 실행하려 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순간 나를 찾아오셨다. 복음으로 중독을 극복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늘 나와 함께 계셨다. 이제부터 폭풍우와 같던 삶 가운데서 허덕이던 내게 따스한 손길을 내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나는 1965년 충북 보은에서 2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조부모님부터 3대째 이어온 크리스천 집안으로, 특히 어머니는 매우 엄격하게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이었다. 대표적인 일화가 하나 있다. 내가 일곱 살 때쯤이었다. 주일이었는데 친구들과 개울가에서 노는 것에 정신이 팔려 교회에 가지 않았다. 한참을 놀다 집에 왔더니 배가 고팠다. 밥을 달라고 했더니 어머니는 단호하게 안 된다고 하셨다. 교회에 가지 않은 것을 아시고 벌을 내리신 것이다. 어머니는 먹을 것을 장독대에 숨겨 두고 하루 종일 나를 굶기셨다. 그 충격이 너무 컸던지 그 이후로 난 교회 주일학교 6년을 개근했다.

아버지는 내가 아홉 살에 심장마비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목사님이 추우실까봐 매번 손수 장작을 패서 지게에 지고 교회에 가져다주실 정도로 헌신적인 분이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가세는 심하게 기울었다.

41세에 과부가 되신 어머니의 유일한 희망은 나였다. 난 항상 전교 1등을 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 어머니는 내가 판사나 검사가 되기를 바랐다. 내 장래 희망은 육군 장군이 되는 것이었다.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교감 선생님이 어머니께 “용원이를 큰 도시로 데려가 공부를 시켜야 한다”고 권유하셨다. 우리 가족은 경기도 부천으로 이사했다. 없는 살림이었지만 어머니는 집 평수를 줄이는 등 허리띠를 졸라매고 이사를 강행했다. 순전히 나의 교육 때문이었다.

부천고로 진학했다. 갑자기 바뀐 환경 탓에 적응하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릴 수는 없었다. 열심히 공부했고, 반에서 5등 정도의 성적을 유지했다. 겉으로는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사실 당시 나는 상당히 위축되어 있었다.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가난한 우리 집이 창피했다. 사춘기여서 더 민감했을지도 모른다. 어느 날 시험공부를 하기 위해 한 친구의 집에 갔다. 부유한 집이었다. 그 친구 어머니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내가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그분이 친구에게 한 말을 듣고 말았다. “넌 왜 하필 저렇게 아버지도 없고 가정형편도 어려운 근본 없는 애하고 어울리니?” 나의 열등감은 폭발했다.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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