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신용원 (2) “근본없는 아이” 놀림에 충격… 가출한 후 탈선

폭력배들과 어울려 본드 흡입·마약… 軍생활 적응못해 손가락 절단 자해

입력 2015-04-14 02:08
[역경의 열매] 신용원 (2) “근본없는 아이” 놀림에 충격… 가출한 후 탈선 기사의 사진
고등학교 1학년 시절 신용원 목사가 소풍 가는 버스 안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두뇌도 명석했고, 리더십도 있어 나름 따르는 친구들도 꽤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나는 자신감을 갖지 못했다. 친구 어머니로부터 “아버지도 없고 가정형편도 어려운 근본 없는 아이”라는 소리를 듣자 상대적 박탈감에 괴로워하던 나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방황과 탈선의 이유를 합리화해서는 안 되지만 나는 폭발한 열등감을 주체하지 못하고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힌 말 한마디가 내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것이다. 말은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

나 하나 바라보고 계신 어머니의 기대는 무거운 짐이었고, 집에서의 충돌도 잦아졌다. 아버지를 먼저 데려가신 하나님이 원망스러웠다. 결국 가출을 했다. 자연스레 불량한 친구들과 어울렸다. 또래 아이들에게 유명세를 탈 만큼 주먹질을 하고 다녔다. 당시 나는 힘이 좋아 씨름 선수로도 활동할 정도였다. 폭력의 주 대상은 부잣집 아이들이었다. 마음에 상처를 받은 것에 대한 보상심리로 작용해서 가정이 유복하다고 알려진 아이들을 심하게 괴롭혔다. 돌이켜 보면 너무도 미안한 마음뿐이다.

고등학교 1학년까지 모범생이던 나는 일탈을 하면서 걷잡을 수 없이 망가져 갔다. 약물에 처음 손을 댄 것도 그 즈음이다. 나와 같이 가출한 또래들과 모여 있던 아지트에서 본드 등을 흡입했다. 환각상태가 되면 괴로운 현실과 마음속의 방황에서 도망친 것 같이 느껴졌다. 당시 약물을 가장 가까운 친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추구해왔던 가치와 신념이 무너졌고, 마음의 공허함은 갈수록 커졌다. 탈선의 정도가 심해지자 학교에서도 퇴학을 당했다. 이후로 몇 학교를 옮겨 다녔다. 어머니가 받은 충격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내 마음을 돌리시려 부단히 애쓰셨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어리석은 생각이었지만 이미 내 인생은 끝이 났고 되돌리기엔 늦었다는 생각을 했다.

당연히 대학 진학은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동네 불량배들과 어울려 다니며 지냈고 약물흡입도 멈추지 않았다. 툭하면 패싸움에 휘말렸다. 결국 보다 못한 가족들은 나를 군대에 보내기로 했다. 마땅히 하는 일도 없었고, 늘 나 때문에 우시는 어머니에게 미안해 따르기로 했다. 당시 내 나이 20세였다. 하지만 내면에 회복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입대를 하자 견딜 수가 없었다. 어려서 장래희망이었던 육군 장성이 아니라 도피하다시피 입대한 내 현실이 원망스러웠다. 불과 4년 사이에 내가 너무 멀리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이 꺾였고, 꿈을 꿀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나를 더 깊은 수렁으로 밀어 넣었다. 군 생활을 잘할 리 없었다. 결국 적응을 못하고 6개월 만에 왼손 두 번째 손가락을 자르는 자해를 저질렀고, 난 불명예제대를 했다.

경기도 부천으로 돌아와서는 다시 폭력배 생활을 시작했다. 타락의 정도는 점차 심해졌다. 1986년쯤 규모가 큰 폭력사건에 관여를 했다가 지명수배령이 내려졌다. 강원도 원주로 도망을 갔다. 타향에 가서도 생활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외롭다는 생각에 그 지역 폭력배들과 어울리며 지냈고, 본드 등 약물을 넘어서 필로폰 등 더욱 심한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마약이라는 것은 결국 인간 스스로가 만든 인공낙원으로 쾌락과 타락의 끝이다.

나는 마약사범들의 자활교육을 할 때 마약을 선악과에 비유해 이야기한다. 보암직하고 먹음직했던 선악과를 먹으므로 해서 아담과 하와는 원죄를 저질렀고, 그들은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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