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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격 인터뷰 마약중독자 재활공동체 대표 신용원 목사

“손가락질 받던 ‘약쟁이 인생’, 기적의 떡이 살렸죠”


신 목사와 <소망을 나누는 사람들>에 대한 언론 보도들.
신 목사와 공동체 회원들이 낭독하는 기도문.
신 목사와 공동체 회원들이 정기 모임에 앞서 기도를 올리고 있다.

 

아홉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란 소년은 유난히 머리가 좋았다. 전국에서 손꼽히는 명문고에 입학한 그의 꿈은 법관이 되는 것. 홀어머니에게 영특한 아들은 유일한 자랑거리이자 삶의 전부였다. 그러나 소년의 꿈은 하루아침에 짓밟히고 말았다. “아비 없는 자식이랑 놀면 안돼!” 귀부인 티가 줄줄 흐르던 친구의 어머니는 날 선 한마디로 소년의 가슴을 찢어놓았다. 배신감에 치를 떤 소년은 잘 사는 아이들만 골라 괴롭히는 ‘문제아’로 전락했다. 복학과 퇴학을 반복하며 학교를 뛰쳐나온 그는 폭력조직에 몸을 담았다. 1994년 조계종 폭력사태 주동인물로 지명 수배까지 됐다. 범죄자로 전락한 그를 수년 간 지배한 것은 본드와 진통제, 대마초와 필로폰이었다. 1998년 경찰 수사망에 쫓기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랫줄에 목을 매기 직전, 그는 마지막으로 신을 찾았다. 그의 나이 서른셋이었다.

“하나님, 당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제발 나 좀 살려주세요.”

기도를 마친 뒤 그는 태어나서 한번도 느껴본 적 없는 황홀경을 경험했다. 마약에 찌든 몸을 꿰뚫는 신심(信心)이 그를 타시 태어나게 했다. 죗값을 치른 그는 신학공부를 시작했고 끝내 목사가 됐다. 마치 한 편의 영화 같은 이야기. 이는 마약중독자 재활 도우미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신용원 목사(44)의 실제 삶이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백발이 성성한 신 목사는 특유의 환한 웃음으로 기자를 맞이했다. 마약치료·재활공동체 교회 <소망을 나누는 사람들>(이하 소나사)의 목사인 그는 <보리떡 다섯 개>라는 이름의 떡 공장도 운영한다.

전국에서 제일 맛있는 떡을 만드는 것으로 소문난 이곳을 꾸려나가는 건 놀랍게도 마약중독자들이다. 생활고와 절망에 찌들어 약물에 손댔던 그들은 이곳에서 망가진 몸과 마음을 치료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

교도소 안에서조차 배척당하던 중독자들에게 신 목사의 <보리떡 다섯 개>는 직장이자 학교이며 마음의 상처를 다스리는 병원이다.

신 목사는 이들이 처한 속사정을 누구보다 잘 안다. ‘홀아비 사정은 과부가 안다’고 신 목사 역시 약물에 빠져 죽을 고비를 넘긴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영화 같은 삶을 살아온 신 목사는 스스로를 “약물 엘리트 코스를 밟은 약쟁이였다”고 소개했다.


본드에서 필로폰까지 “약물 ‘엘리트코스’ 밟았죠”

“가출도 밥 먹듯 하고 주먹 쓰는 친구들과 어울려 다녔죠. 본드에서 시작해 진통제를 수십 알씩 먹기도 했고 대마초에 필로폰까지 속칭 ‘마약 엘리트 코스’를 밟았습니다. 감옥신세도 졌고요.”

홀어머니 밑에서 지방 명문고에 다니던 18살 때였다. 친한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신 목사는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친구의 어머니는 아들을 방으로 불러 “왜 용원이 같이 가난하고 아버지도 없는 애들과 어울리냐”며 역정을 냈다.

충격에 빠진 신 목사는 가출을 했고 폭력조직에 몸을 담았다. 명문고 출신의 모범생은 깡패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끌려간 군대에서는 적응을 못해 왼쪽 검지손가락을 자르고 6개월 만에 불명예 제대했다.

그는 한때 사채업과 부동산 경매, 도박장 운영으로 30억원이 넘는 돈을 굴기도 했다. 그러나 화려한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마약에 찌든 생활에 사업은 기울었고 사람들은 떠났다. 답답한 마음에 그는 더욱 더 순간적 쾌락에 집착했다.

약물은 단계적으로 신 목사의 몸을 좀먹어 들어갔다. 처음엔 동료들과 어울려 본드를 분 것이 다였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환각제 성분이 있는 감기약을 수십 알씩 삼켰고, 대마초를 피우기도 했다. 이마저도 성에 차지 않자 필로폰에까지 손댔다.

결국 지난 1994년 전국을 떠들썩하게 한 조계종 폭력 사태 때 방송에 얼굴이 알려지며 지명 수배된 신 목사. 그는 경찰 수사망을 피해 강원도 원주의 산골로 피신했다. 이후 4년간의 지루한 도피 생활 속에서 독한 마약은 신 목사의 건강마저 빼앗아갔다.

78kg의 당당했던 체구는 48kg으로 쪼그라들었고 머리카락과 이빨은 듬성듬성 빠졌다. 간이 망가져 진통제 없이는 하루도 견딜 수 없을 만큼 고통에 시달렸다. 2차 수배를 받고 신 목사는 경기도의 한 기도원으로 숨어들었다. 자살을 생각하고 있었다.


“나 때문에 영혼 파괴된 이들 구하자”

기도원에 숨어든 뒤, 신 목사는 철물점에서 빨랫줄을 샀다. 늦은 밤 소나무에 목을 맬 생각을 하니 시원하기도 했지만 억울한 마음이 더 컸다.

“맑은 밤하늘을 보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군요. 한때 우등생 소리 들으며 판·검사를 꿈꿨던 신용원이 ‘약쟁이’로 살다 죽는구나 싶어서 말이죠.”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 생각이 났다. 기도원 골방에 틀어박혀 빨랫줄을 손에 쥔 그는 마지막으로 신을 찾았다. “하나님, 당신이 정녕 살아 계시다면 제발 저 좀 살려주십시오.” 바로 그때 놀라운 감각이 신 목사의 몸을 감쌌다. 그는 “필로폰보다 10배는 더 황홀한 경험”이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기독교 신자들이 말하는 ‘신의 응답’을 받은 것 같았다. 절망에 빠졌던 신 목사의 머리 속에 새로운 가치관이 들어섰고 두 눈으로 보이는 세상도 달라졌다.

“나 때문에 가정이 파괴되고 영혼이 망가진 이들에게 진 빚을 갚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물론 주위에선 반신반의했죠. 가족들마저 ‘마약 때문에 완전히 미쳐버린 게 아니냐’고 했을 정도였습니다.”

1년 뒤 안양교도소에서 출소한 그는 3년간의 신학대 생활을 마치고 목사가 됐다. 신 목사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돕기 위해 교도소를 찾아다니기 시작했고 ‘약쟁이 신용원’은 ‘신용원 목사’로 다시 태어났다.

중독자들이 처음부터 신 목사의 손을 흔쾌히 잡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인생역경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조금씩 신 목사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고 출소 뒤 하나 둘 그를 찾아왔다.

마침내 지난 2003년 신 목사는 인천 구월동 모래내 시장에서 이들과 함께 떡집을 열었다. 유난히 찰지고 맛있는 떡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동공단에 330㎡(100여평) 부지의 공장을 지을 수 있었을 만큼 세상을 향한 이들의 진심은 통하는 듯 했다.


“약쟁이들이 만든 음식을 어떻게 먹어!”

소식을 접한 더 많은 약물중독자들이 속속 신 목사 곁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을 고용하기 위해 사업을 더 키워야 했다. 신 목사는 순대국집으로 사업영역을 넓혔다. 철저히 맛으로 승부한 순대국집은 손님들의 입소문을 타 공중파 방송 3사의 맛집 프로그램에 모두 소개될 정도였다.

그러나 마약을 했던 사람들이 가게를 운영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손님들은 기겁을 하며 발길을 끊었다. 아무리 맛과 질로 승부하려해도 비뚤어진 선입견을 바로잡을 수는 없었다. 결국 수억원이 넘는 빚만 떠안은 채 식당은 문을 닫았고, 떡 공장도 규모를 줄여야만 했다.

“편견이라는 게 참 무섭죠. 독거노인과 재소자들에게 무료로 떡을 나눠주는 봉사활동도 했었는데 ‘약쟁이들이 만들었다’는 소문이 퍼지자마자 사람들 태도가 돌변하더군요. 떡집이 들어서기로 했던 건물의 주인이 ‘마약중독자들이 모여 있다’는 말만 듣고 혐오시설 운운해 결국 가게 자리를 옮겨야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주변의 냉대 못지 않게 신 목사를 찾아온 중독자들의 가슴 아픈 사연도 그를 먹먹하게 했다. 갓 스물을 넘긴 신모(당시 21)양은 친아버지에 성폭행 당한 충격으로 가출 한 뒤 마약에 손을 댄 경우였다.

감옥에서 신 목사를 만나 마음의 안정을 찾은 신양은 출소한 뒤 새로운 인생을 살 참이었다. 그런데 잠시 집에 다녀오겠다던 그는 아버지에게 다시 강간을 당했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모 병원장의 아들로 평생 고생을 모르고 살았던 백모(당시 45)씨는 신 목사의 교회를 찾을 때마다 눈물을 흘리곤 했다. 신 목사를 ‘형님’으로 모시던 백씨는 어느 날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오늘 마지막으로 약 하고, 내일부터는 형이랑 인간답게 살게.” 그러나 그날 밤 백씨는 약물 과다투여로 쇼크사 했다. 백씨가 죽은 뒤에야 신 목사는 그가 에이즈 환자였다는 걸 알았다.


“기도와 노동이 그들을 살린다”

신 목사는 약물 중독으로 피폐해진 이들의 새 삶을 돕기 위한 노력과 봉사를 평생 계속할 생각이다. 그들의 재활의지와 능력을 고스란히 담아 세상에서 가장 맛있고 따뜻한 떡을 만드는 게 그의 꿈이다.

“예수님은 고아와 과부, 병든 자와 함께 하셨습니다. 자기 힘으로 사회에서 권리를 보장 받지 못하는 약자의 편에 서라는 것은 예수님이 신앙인들에게 내린 명령 가운데 하나입니다. 기도와 노동이 불쌍한 이들을 살릴 마지막 힘이죠.”
지금껏 신 목사를 거쳐 간 약물중독자들은 줄잡아 400여명. 신 목사는 삶의 마지막 기로에서 위험한 유혹을 이겨낸 이들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자신의 삶을 오롯이 바칠 각오다.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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