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신용원 (5) 간절한 기도에 마약보다 100배 강한 성령 체험

“하나님만 믿고 살겠습니다” 고백에 불덩이와 벅찬 감격이 내 몸 안으로

입력 2015-04-17 02:19
[역경의 열매] 신용원 (5) 간절한 기도에 마약보다 100배 강한 성령 체험 기사의 사진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 대성전 입구 전경. 신용원 목사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찾은 이곳에서 하나님은 강력한 성령 체험을 허락하셨다”고 말했다.
살려 달라는 기도를 하면서 동시에 어머니가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은혜 받아야 내가 산다고 하셨다. 그런데 은혜라는 것은 매우 추상적인 개념 아닌가. 순간 다음 기도가 이어졌다. “하나님, 내가 살고 싶은데 살아갈 자신도 없고, 나 살려면 당신이 주신 은혜를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고 하나님만 믿고 살겠다고 고백했다.

절규 어린 고백 속에 성령 체험을 했다. 성령이 내 몸을 지배할 때 느낀 기분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마약을 한 것보다 더 큰 행복감이었다. 마약은 쾌락의 정점을 느끼게 한다. 인간이 만든 그 어떤 것도 마약이 주는 것 이상의 쾌감을 줄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마약 중독은 무서운 것이다. 한때 나는 마약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이 불쌍하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런데 성령의 임재는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상상할 수 없는 희열을 느끼게 했다. 온몸이 저릿저릿해지며 몸 안으로 불덩이가 들어오는 듯하면서 벅차오르는 감격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나를 사랑한다는 하나님의 확신에 찬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혹자는 이런 나의 경험이 과장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성령 체험은 사람마다 다르며 획일적이지 않을 것이다. 나 같은 사람에게 왜 이렇게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체험을 주셨을지 생각해봤다. 난 마약에 찌들어 산 사람이다. 하나님의 영이, 그 힘이 마약의 쾌감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고 나에게 그런 체험을 허락하신 것이다.

마약 중독자 자조·자활 사역은 엄청난 유혹이 도사리고 있는 일이다. 흑암과 어둠에 붙잡혀 있는 사람들을 돌보고, 하나님께로 이끌려면 그런 어떤 유혹에도 넘어지지 않아야 한다. 다시 마약에 흔들렸다가는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이 유혹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과의 강렬했던 첫 만남을 항상 열망한다.

성령 체험을 하면서 방언의 은사도 받았다. 구르고 가슴을 두드리고 울고 웃으며 그 자리에서 8시간을 기도했다. 정신없이 시간이 가고 날이 밝았다.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 얼굴에 비춰진 햇살은 전날 느꼈던 그것이 아니었다. 불과 하루 전만 해도 세상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던 나였다. 그런데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는데도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 손짓하는 듯 아름답게 보였다. 지나는 사람들이 다 선해 보였다. 모두가 형제요 자매라는 생각이 들었다.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바울이 되었을 때 이런 기분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듬성듬성 머리털이 빠지고, 문드러진 치아의 몰골을 한 사람이 웃고 있었으니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여담이지만 현재 나의 치아는 대부분 의치다. 마약 탓에 다 상해버렸다.

그 길로 기도원에서 내려왔고, 부천으로 돌아왔다. 내가 체험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전하지 않으면 가슴이 답답해 견딜 수 없었다. 노방전도를 하기로 결심했다. 전도의 방법도, 하나님 말씀도 몰랐지만 서울 신촌역과 경기도 안양역 앞에 가서 무작정 떠들어댔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말하고, 하나님을 만난 이야기를 했다. 그때마다 감격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시간이 지나며 하나님을 더욱 알리고 싶었다. 하지만 간증에서 더 나아갈 수 없었다. 하나님 성품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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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신용원 (4) 뇌출혈로 쓰러지신 어머니 위해 눈물로 기도

72시간 혼수상태서 기적적인 회복… 감사는 그뿐 또다시 방탕한 생활

입력 2015-04-16 02:35
[역경의 열매] 신용원 (4) 뇌출혈로 쓰러지신 어머니 위해 눈물로 기도 기사의 사진
성찬식을 진행하고 있는 신용원 목사. 신 목사는 “예수님의 보혈의 피가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 이 세상에 없었을 것”이라고 고백했다.
손에서 마약을 놓지 못했다. 후유증으로 머리털은 빠지고 치아도 문드러져 갔다. 가족과의 관계는 당연히 악화됐다. 약을 끊으려고 한국을 떠났다. 이곳저곳을 여행하면서 각오를 새롭게 다지고, 앞으로 무슨 일을 하며 살지를 고민했다.

뉴질랜드에 있을 때였다. 집에 전화를 걸었는데 형의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 갑자기 어머니가 쓰러지셨고, 혼수상태라고 했다. 불과 얼마 전인 어버이날에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었는데 당시 어머니가 머리가 무겁고 아프다고 하셨던 기억이 났다. 의사는 감기라고 진단했지만 오진이었다. 뇌출혈이었다. 어머니가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다.

당장 귀국했다. 병실 앞에서 절규했다. 하나님께 어머니를 살려주면 마약을 끊고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겠다고 울면서 기도했다. 가족 모두의 간절한 염원에 대해 하나님은 응답하셨다. 어머니는 72시간 동안 혼수상태에 있다가 깨어나셨다. 정말 다행인 것은 뇌출혈을 앓은 대다수가 후유증으로 풍이 든다고 하는데 어머니는 이를 겪지 않으셨다. 만약 그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면 후에 내가 회심하고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나 사역을 시작할 때, 나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께서 완전히 회복하시고 집안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혹시 어머니가 다시 쓰러지실까봐 해외에 나갈 생각을 접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나는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것에 대한 감사를 금방 잊어버렸다.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했으리라. 어머니가 아프셨을 때는 다급한 마음에 하나님을 찾았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내 바람을 들어주면 따르겠다는 치기 어린 기도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조차도 예쁘게 보셨고 응답하셨지만 나는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자 가장 든든한 지지자를 살려주셨는데도 나는 약속으로 내걸었던 변화된 삶을 살지 못했다. 방황과 방탕의 시간은 계속됐다. 20대 후반부터 사채사업을 하거나 재즈바 등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또다시 마약에 손을 댔다. 결국 마약사범으로 여러 차례 수감생활을 했다. 수감생활을 하고 나면 자연스레 그간 이뤄놨던 사업의 성과들이 무너지기 마련이다. 돈도 잃고, 친구도 잃었다. 마약은 자아를 파괴시키고 무력감에 빠져들게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웃과 화목을 이룰 것을 권면하지만 마약은 사람들과의 관계와 자신의 내면을 파괴한다.

앞서 말했듯 마약 중독의 말로는 죽음이다. 마약 탓에 연거푸 수감생활을 하고 사업에 실패했지만 끊지 못했고, 그렇게 몇 번 동일한 과정이 반복되자 나는 지독한 상실감에 빠졌다. 그리고 스스로 생명을 끊어야겠다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뭘 해도 마약 때문에 안 될 것 같았다. 자살을 시도하기 전 내가 마지막으로 찾아간 장소는 경기도 파주에 있는 오산리 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이다. 왜 그곳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죽기 전에 하나님께 마음껏 따지고 싶었던 것 같다. 목 놓아 울며 기도하는 사람들 틈에 자리를 잡았다. 무엇을 간구해야 할지 몰랐다. 그냥 모든 게 원망스러웠다. 다 놓아 버리려고 하니까 마음이 편안한 것 같으면서도 이렇게 인생이 끝난다는 것에 대한 허무함도 있었다.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뒤엉켜서 지나갔다.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내 입에서 먼저 나온 기도는 단 한 문장이었다. “하나님 살고 싶어요.”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역경의 열매] 신용원 (3) 마약에 찌들었던 시절 교회로 나를 이끈 어머니

폭력 사건으로 수배 된 후 약물 손대… 괴물 되어가는 아들 보며 상심 컸을 것

입력 2015-04-15 02:48
[역경의 열매] 신용원 (3) 마약에 찌들었던 시절 교회로 나를 이끈 어머니 기사의 사진
신용원 목사의 어머니 변보배 권사(오른쪽). 신 목사는 “어머니의 강직한 신앙과 기도가 나를 수렁에서 건져냈다”고 말했다.
처음에 마약을 접했을 때는 낙원을 경험하는 것 같겠지만 결국은 본인을 파괴시키게 된다. 약 기운으로 느끼는 쾌락은 일시적이며 약 기운이 빠지고 밀려오는 공허함은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다. 결국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다시 약을 찾게 되고, 그렇게 중독 상태가 심해진다. 중독의 사슬을 끊기란 세상 어떤 것보다 어려운 일이다. 때문에 마약에는 아예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폭력사건 수배자로 도피 생활을 하다가 그에 맞는 처벌을 받고, 다시 부천으로 돌아왔다. 약물에 손을 대고, 마약에 빠지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가만히 생각해 보니 ‘가난’에서 출발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얼른 돈을 벌자는 생각밖에 없었다. 친구들과 경매(競賣)일을 시작했다. 돈이 꽤 모이기 시작했다. 돈이 생기니 삶의 의욕이 생기면서 마약을 접하는 횟수도 줄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산경매를 하러 한 집에 찾아갔다. 가전제품들을 가지고 나오려는데 그 집의 꼬마가 울기 시작했다. 특히 책상을 들고 나오려고 하자 아이는 대성통곡을 했다. 그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가난 때문에 박탈감을 경험하는 그 아이가 처해 있는 상황이 과거 내가 겼었던 상황과 다를 바가 없었다. 결국은 경매라는 것이 사업 실패 등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부를 빼앗아 내가 부를 축적하는 일이었다. 충격을 받은 나는 아이의 책상을 포함해 그 집의 물건을 다 돌려주고 그날부터 경매일을 접었다.

경매일을 해서 모은 돈을 어떻게 불릴까 고민하다가 형님 사업에 투자하기로 했다. 건물을 관리하는 용역회사였다. 장남이자 장손인 형님은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일념 하에 사업에 매진하셨다. 나 역시 형님을 도와야겠다고 다짐했다. 자금 투자는 물론 건물 청소 일을 직접 하기로 했다. 신성한 노동을 통해 마약과 폭력으로 방황했던 시간, 편법과 탈법을 하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며 돈을 버는 일을 청산하겠다고 생각했다.

약 3년이 지나며 형님 사업은 자리를 잡아갔다. 부자는 아니지만 가난에 찌들어 살지도 않았다. 문제는 나였다. 내 안에 욕심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불쑥불쑥 차올랐다. ‘그저 청소용역 일이나 하며 내 인생은 여기서 주저앉는 것인가’라는 생각에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때를 노린 듯 유혹은 강력하게 찾아왔다. 나는 또 마약에 손을 댔다.

히로뽕과 헤로인 등 마약에 찌들어 있던 그 시절, 가장 마음 아팠을 사람은 바로 어머니였다. 남편이 죽고 이른 나이에 과부가 된 어머니는 상실감을 조금이라도 채워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막내아들이 괴물이 되어 가는 것을 보며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을 것이다. 어머니는 나에게 수시로 교회에 가자고 권하셨고, 나는 그때마다 짜증을 냈다. 성화에 못 이겨 어쩌다 교회에 나가도 어머니 몰래 예배 시작 전에 빠져 나왔다.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싫었다. 설교는 모두 거짓말 같았다. 어느 날은 교회에 가자고 다그치시는 어머니를 향해 “하나님이 있다면 교회에 헌신했던 아버지는 왜 그렇게 일찍 죽게 했으며 어머니는 왜 그렇게 힘들게 사느냐”며 “하나님은 없으니 정신 차리라”고 소리를 질렀다. 참으로 못된 아들이었다. 어머니는 우셨지만 나에게 확고하게 말씀하셨다. “하나님 은혜를 받아야 네가 산다.”

돌이켜 보면 어머니의 고집스럽고 강직한 성품이 고난과 환란 가운데서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나님마저 놓쳐 버리면 어머니는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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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신용원 (2) “근본없는 아이” 놀림에 충격… 가출한 후 탈선

폭력배들과 어울려 본드 흡입·마약… 軍생활 적응못해 손가락 절단 자해

입력 2015-04-14 02:08
[역경의 열매] 신용원 (2) “근본없는 아이” 놀림에 충격… 가출한 후 탈선 기사의 사진
고등학교 1학년 시절 신용원 목사가 소풍 가는 버스 안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두뇌도 명석했고, 리더십도 있어 나름 따르는 친구들도 꽤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나는 자신감을 갖지 못했다. 친구 어머니로부터 “아버지도 없고 가정형편도 어려운 근본 없는 아이”라는 소리를 듣자 상대적 박탈감에 괴로워하던 나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방황과 탈선의 이유를 합리화해서는 안 되지만 나는 폭발한 열등감을 주체하지 못하고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힌 말 한마디가 내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것이다. 말은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

나 하나 바라보고 계신 어머니의 기대는 무거운 짐이었고, 집에서의 충돌도 잦아졌다. 아버지를 먼저 데려가신 하나님이 원망스러웠다. 결국 가출을 했다. 자연스레 불량한 친구들과 어울렸다. 또래 아이들에게 유명세를 탈 만큼 주먹질을 하고 다녔다. 당시 나는 힘이 좋아 씨름 선수로도 활동할 정도였다. 폭력의 주 대상은 부잣집 아이들이었다. 마음에 상처를 받은 것에 대한 보상심리로 작용해서 가정이 유복하다고 알려진 아이들을 심하게 괴롭혔다. 돌이켜 보면 너무도 미안한 마음뿐이다.

고등학교 1학년까지 모범생이던 나는 일탈을 하면서 걷잡을 수 없이 망가져 갔다. 약물에 처음 손을 댄 것도 그 즈음이다. 나와 같이 가출한 또래들과 모여 있던 아지트에서 본드 등을 흡입했다. 환각상태가 되면 괴로운 현실과 마음속의 방황에서 도망친 것 같이 느껴졌다. 당시 약물을 가장 가까운 친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추구해왔던 가치와 신념이 무너졌고, 마음의 공허함은 갈수록 커졌다. 탈선의 정도가 심해지자 학교에서도 퇴학을 당했다. 이후로 몇 학교를 옮겨 다녔다. 어머니가 받은 충격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내 마음을 돌리시려 부단히 애쓰셨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어리석은 생각이었지만 이미 내 인생은 끝이 났고 되돌리기엔 늦었다는 생각을 했다.

당연히 대학 진학은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동네 불량배들과 어울려 다니며 지냈고 약물흡입도 멈추지 않았다. 툭하면 패싸움에 휘말렸다. 결국 보다 못한 가족들은 나를 군대에 보내기로 했다. 마땅히 하는 일도 없었고, 늘 나 때문에 우시는 어머니에게 미안해 따르기로 했다. 당시 내 나이 20세였다. 하지만 내면에 회복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입대를 하자 견딜 수가 없었다. 어려서 장래희망이었던 육군 장성이 아니라 도피하다시피 입대한 내 현실이 원망스러웠다. 불과 4년 사이에 내가 너무 멀리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이 꺾였고, 꿈을 꿀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나를 더 깊은 수렁으로 밀어 넣었다. 군 생활을 잘할 리 없었다. 결국 적응을 못하고 6개월 만에 왼손 두 번째 손가락을 자르는 자해를 저질렀고, 난 불명예제대를 했다.

경기도 부천으로 돌아와서는 다시 폭력배 생활을 시작했다. 타락의 정도는 점차 심해졌다. 1986년쯤 규모가 큰 폭력사건에 관여를 했다가 지명수배령이 내려졌다. 강원도 원주로 도망을 갔다. 타향에 가서도 생활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외롭다는 생각에 그 지역 폭력배들과 어울리며 지냈고, 본드 등 약물을 넘어서 필로폰 등 더욱 심한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마약이라는 것은 결국 인간 스스로가 만든 인공낙원으로 쾌락과 타락의 끝이다.

나는 마약사범들의 자활교육을 할 때 마약을 선악과에 비유해 이야기한다. 보암직하고 먹음직했던 선악과를 먹으므로 해서 아담과 하와는 원죄를 저질렀고, 그들은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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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신용원 (1) 마약 중독자, 하나님 손길로 복음을 선물받다

신앙으로 심각한 중독 극복한 이후 17년째 약물 중독자들의 자활 도와

입력 2015-04-13 02:58
[역경의 열매] 신용원 (1) 마약 중독자, 하나님 손길로 복음을 선물받다 기사의 사진
신용원 목사(앞줄 왼쪽 두 번째)와 ‘소망을 나누는 사람들’ 회원들이 지난해 11월 워크숍을 마치고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나는 약물 등 중독자들의 자조·자활을 돕는 공동체인 ‘소망을 나누는 사람들’의 대표다. 우리 공동체는 매월 서울과 경기도 수원에 있는 구치소, 부산과 강원도 원주·춘천에 있는 교도소 등을 돌며 마약 사범들을 대상으로 치료재활교육을 한다. 마약사범 가족들을 위한 상담도 하고 있다.

이 사역을 올해까지 햇수로 17년째 지속하고 있다. 혹자는 사회에서 처절히 외면 받고, 남들이 기피하는 사람들을 돌보는 일이 힘들지 않느냐고 묻는다. 당연히 고된 일이다. 때로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나기도 한다. 하지만 감당해야 한다. 지금 내가 이렇게 삶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선물이기 때문이다.

나는 매우 심각한 마약 중독자였다. 마약 중독의 끝은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한때 그런 결정을 내리고, 실행하려 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순간 나를 찾아오셨다. 복음으로 중독을 극복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늘 나와 함께 계셨다. 이제부터 폭풍우와 같던 삶 가운데서 허덕이던 내게 따스한 손길을 내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나는 1965년 충북 보은에서 2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조부모님부터 3대째 이어온 크리스천 집안으로, 특히 어머니는 매우 엄격하게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이었다. 대표적인 일화가 하나 있다. 내가 일곱 살 때쯤이었다. 주일이었는데 친구들과 개울가에서 노는 것에 정신이 팔려 교회에 가지 않았다. 한참을 놀다 집에 왔더니 배가 고팠다. 밥을 달라고 했더니 어머니는 단호하게 안 된다고 하셨다. 교회에 가지 않은 것을 아시고 벌을 내리신 것이다. 어머니는 먹을 것을 장독대에 숨겨 두고 하루 종일 나를 굶기셨다. 그 충격이 너무 컸던지 그 이후로 난 교회 주일학교 6년을 개근했다.

아버지는 내가 아홉 살에 심장마비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목사님이 추우실까봐 매번 손수 장작을 패서 지게에 지고 교회에 가져다주실 정도로 헌신적인 분이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가세는 심하게 기울었다.

41세에 과부가 되신 어머니의 유일한 희망은 나였다. 난 항상 전교 1등을 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 어머니는 내가 판사나 검사가 되기를 바랐다. 내 장래 희망은 육군 장군이 되는 것이었다.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교감 선생님이 어머니께 “용원이를 큰 도시로 데려가 공부를 시켜야 한다”고 권유하셨다. 우리 가족은 경기도 부천으로 이사했다. 없는 살림이었지만 어머니는 집 평수를 줄이는 등 허리띠를 졸라매고 이사를 강행했다. 순전히 나의 교육 때문이었다.

부천고로 진학했다. 갑자기 바뀐 환경 탓에 적응하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릴 수는 없었다. 열심히 공부했고, 반에서 5등 정도의 성적을 유지했다. 겉으로는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사실 당시 나는 상당히 위축되어 있었다.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가난한 우리 집이 창피했다. 사춘기여서 더 민감했을지도 모른다. 어느 날 시험공부를 하기 위해 한 친구의 집에 갔다. 부유한 집이었다. 그 친구 어머니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내가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그분이 친구에게 한 말을 듣고 말았다. “넌 왜 하필 저렇게 아버지도 없고 가정형편도 어려운 근본 없는 애하고 어울리니?” 나의 열등감은 폭발했다.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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