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신용원 (10) 중독자 사역의 가장 큰 좌절은 사람에 대한 실망

어머니와 아내의 응원에 시련 극복… 후원금·대출로 자활 위한 순대공장을

입력 2015-04-24 00:09
[역경의 열매] 신용원 (10) 중독자 사역의 가장 큰 좌절은 사람에 대한 실망 기사의 사진
‘소망을 나누는 사람들’의 가족들이 교회에서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 모습.
사람은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신뢰는 언제고 깨질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해야 하는 존재다. 예수님도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

사역을 하면서 맛본 가장 큰 좌절은 사람에 대한 실망이었다. 나를 찾아와 함께 머물던 중독자들을 신앙교육을 통해 치유하려 했지만 믿음의 뿌리가 없기에 쉽게 흔들렸다. 중독자끼리 모여 있다 보니 누군가 마약을 몰래 가지고 와서 다시 공급을 하면 그 유혹을 뿌리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열심히 재활훈련을 하고 예배를 드리던 친구들이 마약의 유혹에 다시금 무너져 교도소로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너무나 큰 고통이었다.

하지만 더욱 속상한 것이 있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까 내가 점점 익숙해지는 것이다. 처음에는 누군가 체포를 당했다고 하면 목 놓아 대성통곡을 했다. 며칠 밤을 새워가며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지만 몇 번 동일한 일이 발생하니 눈물이 나오지 않았고, 약간 아쉬울 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도 미안하다.

당시 찾아오는 이들을 더 이상 집에서 수용할 수 없어 인근에 조그만 공간을 얻었다. ‘소망을 나누는 사람들의 교회’라고 부르기로 했다.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50만원. 그곳에서 예배도 드리고 재활교육을 했다. 어느 날 철야가 끝나고 공동체 사무실에서 내려가는데 건물이 참 낡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내가 처한 현실이 처량했다. 나름 의욕을 갖고 하나님 일을 한다고 하는데 별다른 성과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가 타고 낡고 더러운 계단이 나의 모습 같았다. 가치가 없어 보였다.

내가 기죽어 있으니까 아내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이야기했다. “남편, 이 계단의 흔적이 부끄럽고 해어졌지만 기죽지 마세요. 기댈 곳 없고, 위로해 줄 사람 없는 이들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은 하나님의 상급이에요.” 그 말이 참 위로가 됐다. 약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의 격려도 힘이 됐다. 어머니는 내가 방황하던 17세부터 34세까지 17년간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나를 위해 새벽기도를 하셨다. 목사가 된다고 했을 때 처음엔 놀라셨지만 점차 든든한 응원군이 되셨고, 내가 목사 안수를 받았을 때는 만세를 부르며 좋아하셨다. 이 사역을 시작했을 때도 역시 “너를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겠다”며 쉬지 않고 기도를 하고 계신다. 든든한 동역자로 서 있는 두 사람 덕분에 흔들리는 마음을 잡았다.

공동체 구성원들의 재활을 위해서는 현실적인 문제가 뒤따랐다. 바로 돈 문제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내가 엄청난 부자이거나 후원을 넉넉하게 받는다면 재활교육에만 전념할 수 있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공동체 구성원들이 헌금을 낼 수 있는 형편들이 못됐다. 마약을 했다고 소문이 나면 아무리 끊었다고 말을 해도 재취업이 너무도 힘들다.

공동체가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야 했다. 이들이 자립적으로 사업체를 운영한다면 이 역시 재활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마약을 끊고 모여 함께 일을 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도 우리를 인정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특별한 기술 없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다. 고민 끝에 결정한 것은 순대 공장이었다. 누구나 조금만 배우면 할 수 있는 일이다. 약간의 후원금을 모으고 은행 대출을 받아 인근 시장에 100평짜리 순대 공장을 차렸다. 이들과 함께 순대를 만들어 납품을 하면서 차근차근 나아질 생활을 꿈꿨다.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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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신용원 (9) 결혼 보름 만에 신혼집이 중독자들 가정교회로

10평도 안되는 집에 20여명이 북적… 믿음의 아내, 불평없이 중독자 보살펴

입력 2015-04-23 00:18
[역경의 열매] 신용원 (9) 결혼 보름 만에 신혼집이 중독자들 가정교회로 기사의 사진
신용원 목사와 아내 안진숙 사모, 쌍둥이 딸의 모습. 신 목사는 “아내의 헌신 덕분에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교도소 사역을 하면서 연을 맺은 수감자들이 출소 후 찾아왔다. 마음을 잡고 살아보려 했지만 마약을 끊기 어려웠고, 그런 자신들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을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에 의지할 곳이 필요했을 것이다. 절도나 사기 등에 비해 마약사범에 대한 인식은 훨씬 더 안 좋은 편이다.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지만 그들을 수용할 공간이 마땅치 않았다. 교회를 개척한 것도 아니었고 개척할 돈도 없었다. 오갈 데 없는 8명을 나의 신혼집으로 데려왔다. 자연스레 가정교회가 형성됐다. 사람들은 점차 늘어 20명 이상이 되었고, 10평도 안되는 집은 포화상태가 됐다. 하지만 이들이 복음을 받아드리며 예배의 열기는 뜨거웠다. 찬양하고 기도하며 나중에는 빌라의 옥상에서 예배를 드렸다.

생각해 보면 나에겐 신혼기간이 없었다. 2001년 6월 결혼을 하자마자 보름 정도만 단둘이 살았을 뿐 이후 마약 중독자들이 집에 함께 머물렀기 때문이다. 아내에게는 늘 미안했다. 새색시가 마약에 취해 있던 사람들과 함께 지내면서 얼마나 불안했을까. 사역을 하기 위해 집 밖으로 나설 때면 혹여 집에 머물고 있는 이들이 아내에게 험한 짓을 할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늘 아내의 안위를 위해 기도했다.

아내는 지금까지도 불만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현재도 형편이 좋은 것은 아니다. 나와 아내, 그리고 쌍둥이를 포함한 세 딸은 한방에서 같이 지낸다. 아이들이 크고 사춘기가 시작되니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고 그럴 때 아버지로서 미안함이 있다. 하지만 아내는 항상 나의 편을 들어준다. 환경을 탓하지도 않는다.

아내는 내가 운영하던 재즈바의 손님이었다. 그렇게 자주 만나면서 교제를 시작했다. 후에 내가 마약을 했던 것도 알게 됐지만 꿋꿋하게 내 옆을 지켰다. 결혼을 한다면 이 여자와 하겠다고 다짐했다. 아내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내는 내가 방황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좋아하는 일을 찾으면 열심히 할 사람’이 될 거라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데이트를 할 때 내가 노점상 할머니나 노숙자들에게 아이스크림이나 과자를 수시로 사주고 했었는데 그런 모습을 보면서 따뜻한 내면을 가진 사람이라 여겼다고 했다.

아내는 내가 회심을 하고 목회를 하겠다고 하자 격려를 잊지 않았다. 주변 모두가, 심지어 나의 가족도 내가 목사가 되겠다고 했을 때 반대했지만 아내는 날 지지했다. 좋은 목회자가 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자신이 목사의 아내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만한 그릇이 아니라고 했다. 장모님의 반대도 매우 심했다. 당시 TV 다큐멘터리에 소개된 내 이야기를 보시고, 내가 마약 중독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남편이 일찍 돌아가시고, 외동딸인 아내를 많이 의지하셨던 장모님의 입장에서는 나와의 결혼을 쉽게 허락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아내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제게 허락하신 배필이라면 이 여자의 마음을 열어주시고, 당신의 사역을 같이 감당해 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했다. 아내와 장모님을 설득하기 위해 수시로 찾아갔다. 지극한 기도와 설득 덕분에 마침내 마음을 돌릴 수 있었고 결혼을 할 수 있었다. 아내는 딸들의 신앙교육에 힘쓴다. 다행히 자녀들은 하나님의 돌보심 아래 잘 성장하고 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아내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역경의 열매] 신용원 (8) 마약중독 치유 첫 단계 “성경 일독부터 하세요”

“중독자도 주님이 보내주신 동역자”… 성경 읽기 통해 하나님 체험케 해

입력 2015-04-22 00:21

[역경의 열매] 신용원 (8) 마약중독 치유 첫 단계 “성경 일독부터 하세요” 기사의 사진
19일 인천 소망을 나누는 사람들 본부에서 신용원 목사(가운데)와 한순덕(왼쪽), 신동우 집사 부부의 모습.

하나님은 나를 홀로 두지 않으셨다. 나 혼자의 힘으로 이 사역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교도소 마약사범 재활교육 사역을 하기로 결정했을 즈음 신동우 집사 부부가 나를 찾아왔다. 그들과의 만남은 지금 ‘소망을 나누는 사람들’ 공동체의 출발점이다. 또한 그 가정의 변화는 나의 소중한 간증거리다.

동우가 나를 찾아오게 된 것은 아내 한순덕 집사 덕분이다. 동우는 마약 중독자였다. 한 집사는 마약을 끊지 못하는 남편을 포기하려던 차에 신문에 실린 나의 인터뷰 기사를 보고 찾아온 것이다. TV 다큐멘터리 방송 이후 나는 몇 차례 언론과 인터뷰를 했었다.

처음 만난 동우에게서 나의 모습을 봤다. 초점 흐린 눈동자, 삶의 의욕을 잃은 모습이었다. 그는 20대 초반부터 각종 약물에 노출됐다. 한 집사와는 고등학생 때부터 친구로, 한 집사는 동우가 마약에 노출된 것을 알고도 결혼을 했다. 당시 그녀는 중독의 무서움을 미처 알지 못했을 것이다. 결혼 후 히로뽕을 배운 동우는 마약사범으로 구속됐다. 한 집사는 남편 수발을 한 차례 들면서 현실과 마주했을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인식하기에는 부족했다. 동우는 아내에게 “다시는 마약에 손 대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일순간일 뿐이었다. 이후에도 수차례 마약을 했고, 수감되기를 반복했다.

가족들은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 한 집사는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들 사이에 두 명의 아들이 있었지만 제대로 부모 노릇을 하기란 힘들었을 것이다.

아이들은 아버지가 수시로 잡혀가는 모습을 보면서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다. 큰아들은 틱 장애를, 작은아들은 자폐를 앓았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한 집사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당시 교회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 마약 중독자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교회에 가서 하면 목회자들이 당황했다고 한다. 당연하다. 보편적인 경험이 아니기 때문이다. 잘 아는 분야도 아닐 것이다.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으랴. 답답한 마음에 기도원에 찾아가 울며불며 기도했다고 한다. 하지만 남편은 변하지 않았다. 동우는 또 다시 수감됐다. 결국 그녀는 이혼하기로 결심했다. 그즈음 나의 인터뷰 기사를 본 한 집사의 언니가 그녀에게 전화를 했고, 기사를 읽어보라고 권했다.

어차피 이혼할 바에야 마지막으로 희망을 가져보자는 생각에 한 집사는 나를 찾아왔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그날 밤 기도를 했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동역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경험을 들려주었다. 내가 어떻게 마약 중독을 극복했는지 말이다.

몇 개월이 지나 한 집사는 출소한 동우를 내게 데려왔다. 나는 동우를 만나자마자 말했다. “너는 나랑 성이 같으니 내 동생 해라. 그리고 너는 내 말만 따르면, 나처럼 하면 마약을 끊을 수 있다.” 얼마나 막연한 이야기인가. 아마 믿기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동우에게 성경 일독을 지시했다.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을 체험하란 것이었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동우는 한두 달 내 비위를 맞추면 내가 놓아줄 것이라고 생각했단다.

하지만 성령님은 예상치 못한 곳에 임하신다. 성경을 읽으라는 나의 지시에 동우는 우직하게 따랐고, 결국 변화됐다. 마약을 끊게 됐다. 이후 동우 부부는 집사가 됐고 지금까지 교도소의 마약사범 재활 교육을 비롯해 나의 모든 사역의 든든한 조력자로 함께하고 있다. 그의 아들들은 틱 장애와 자폐 증상을 이겨냈다. 실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다.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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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신용원 (7) 마약퇴치운동본부 “청소년 재활교육 맡아달라”

신학교서 ‘마약 극복한 인물’ 유명세… 아이들에게 경험 들려주고 기도해줘

입력 2015-04-21 00:20
[역경의 열매] 신용원 (7) 마약퇴치운동본부 “청소년 재활교육 맡아달라” 기사의 사진
국내 한 교도소에서 신용원 목사가 마약 사범 재활교육을 하고 있는 모습.
신학교에 처음 입학했을 때는 사람들을 피해 다녔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학우들과 정기적으로 기도모임을 가졌다. 단순히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간증하며 서로를 위해 중보기도를 하기도 했다. 나의 이야기는 학우들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학교에서는 ‘마약을 이기고 회심한 인물’로 나름 유명세를 탔다. 이는 출석하고 있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굳이 숨길 필요가 없었기에 과거의 내 삶을 솔직하게 간증했다. 처음에는 겁내는 사람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나의 회심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어갔다. 내 이야기에 관심을 가진 교회 집사님 중 한 분이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에 내 이야기를 전했고, 마약퇴치운동본부에서는 내게 본드 등 약물에 중독된 중·고등학생을 위한 재활교육을 해 달라고 요청했다.

선뜻 수용하기는 어려웠다. 약물이라면 정말 징글징글했기 때문이다. 나는 마약 중독의 끝을 경험해본 사람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까지 했던 사람이다. 마약과는 다시는 엮이고 싶지 않았다. 만약 약물에 중독된 사람들의 재활을 돕거나 돌보는 일을 하면 자연스레 마약과 관련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다시 기도를 했다. 기도하는 가운데 자꾸만 나의 과거가 떠올랐다. 누군가 내게 약물 중독의 위험성을 일찍 알려주었다면 조금 더 일찍 정신을 차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나님께서는 내가 세상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약물에 빠져 일탈을 시작한 것이 청소년기였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셨다.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약물에 빠진 청소년들을 만나보니 과거의 나를 보는 듯했다. 대부분이 불우한 가정환경에 놓여 있었다. 불공평한 세상에 나름 저항하려 했으나 결국 이기지 못하고 본드나 약물 등을 택했다. 아이들과 눈을 마주할 때마다 눈물이 났다. 동시에 이들에게 꼭 필요한 말을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독은 세상 기준에서 볼 때 해결하기 매우 어려운 문제지만 성령께서 임하시면 한순간에 정리될 수 있다. 현재의 행동심리학은 중독을 ‘영적인 문제’라고 정의한다. 중독 상태를 일시적으로 중단시킬 수는 있지만 본질적인 것은 완벽히 치유하기 어렵다고 결론을 낸 것이다. 중단된 상태라면 언제든지 마약을 다시 시작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결국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이 전해져야 마약 중독을 완벽히 끊을 수 있다.

당시 만난 아이들에게 내 경험을 들려주었다. 그들을 위해 강력히 기도했다. 그렇게 사역을 지속하고 있을 즈음 KBS에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통해 내 삶을 소개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지금은 종영한 ‘이것이 인생이다’라는 프로다. 참 신기했다. 그리고 감사했다. 그 누구의 주목도 받을 수 없었던 나와 내 삶을 세상 사람들에게 소개할 수 있다는 것과 심지어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고 칭송받는 것 모두가 믿기지 않았다.

방송을 보고 한 교도소에서 근무하고 있던 분이 연락을 하셨다.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마약사범들을 교육해 달라고 요청했다. 마약 중독자들을 회복시키고 돌볼 수 있는 사람은 나 말고도 많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를 들어 쓰신 이유가 분명하게 있을 것이다. 온전히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마약 중독을 극복했기 때문이다. 기도 끝에 교소도 사역을 감당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나 혼자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때에 맞게 적절한 동역자들을 붙여주셨다.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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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신용원 (6) “기도로 1등 하겠습니다” 34세에 신학대 입학

“목회의 길·섬길 이를 가르쳐주세요” 하루 3∼4시간 자며 2시간 이상 기도

입력 2015-04-20 00:09
[역경의 열매] 신용원 (6) “기도로 1등 하겠습니다” 34세에 신학대 입학 기사의 사진
개혁신학대학원대학교 졸업식에서 신용원 목사(왼쪽)의 모습. 신 목사는 “신학생 시절 금식기도를 하는 가운데 성령이 임하셔서 현재 사역에 대한 단초를 알려주셨다”고 말했다.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열정이 끓어올랐다. 하나님을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은 신학을 해야겠다는 다짐으로 귀결됐다. 가장 먼저 가족들에게 말했다. 그러나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았다. 내가 살아온 삶을 봐온 이들로서는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마약에 찌들어 살았고, 폭력배 등으로 타락한 생활을 일삼아 오지 않았던가. 계속 희죽희죽 웃었고, 틈만 나면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등 너무 변한 내 모습에 정신이 나갔다는 말을 했다. 형제 중에는 나를 보고 악귀에 씌었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친구들도 내가 실성했다고 했다. 어떤 친구들은 내가 이런저런 사업을 하다가 마약 탓에 다 망가져서 이제 종교사업에 손을 대려고 한다 했다. 사이비 교주가 되려고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용원이 네가 신학교 가서 목사를 하면 지나가는 개가 웃겠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내 결심은 바뀌지 않았다. 지인의 추천으로 알게 된 개혁신학대학원대학교를 무작정 찾아갔다. 입학을 위해 준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정보를 얻고 준비를 시작했다. 내 나이 34살.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대학공부를 시작하기에 늦은 나이였지만 내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입학을 했지만 수업과정을 따라가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살다가 왔는데 무엇을 알 수 있었겠나. 하지만 생각해보면 나의 신앙은 매우 순수한 상태였다. 방탕하게 살다가 진정한 신앙을 갖게 된 것이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외모만 보고 학교의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했다. 그래서 학교에 가면 사람들하고 부딪히지 않으려고 피해 다녔다. 학교 끝나고, 노방전도하고 산에 기도를 하러 갔다가 바로 집에 갔다. 당시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했다. “하나님 제가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로 1등을 할 수는 없겠지만 기도로는 1등을 하겠습니다.”

한번 기도를 시작하면 기본적으로 무조건 2시간 이상은 지속했다. 잠을 3∼4시간밖에 자지 않았다. 새벽기도, 산기도 등 할 수 있는 한 무조건 기도를 했다. 당시의 영적 갈급함은 너무도 심했다. 내가 어떤 전도자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1학년을 마치고 겨울방학 때 처음으로 21일 금식기도를 시작했다. 당시의 기도 제목은 단순했다. “내가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 깨닫게 해주십시오.” 정확한 소명을 알게 해달라고 간구했다. 한국 땅에 수만명의 목회자들이 있는데 그중에 내가 어떤 목회자가 되어야 할지 너무도 궁금했다. 내가 섬길 이들이 누구일지 고민했다. 당시 생각한 대상은 청소년이었다. 나의 일탈이 시작된 것이 청소년기였기 때문이다. 과거의 나와 같이 방황하는 아이들을 위로하고 친구가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금식기도를 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신학교의 선배와 동기들을 보면 모두가 “예수님 닮기 원한다”고 기도를 했다. 그 기도가 너무 추상적이라 생각했다. 나도 예수님을 닮고 싶은데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지 와 닿지가 않았다. 그래서 답을 찾으려 했다.

금식기도 중에 성령께서 임하셔서 응답하셨다. “용원아 내가 고아와 과부와 병든 자들과 같이 먹고 마시지 않았느냐.” 그 음성을 듣고 정말 많이 울었다. 하지만 고아와 과부, 병든 자같이 소외된 이웃이 너무도 많은데 누구를 돌보고 복음을 전해야 할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그런데 금식기도가 끝나고 내려오는 날 거짓말같이 마약퇴치운동본부라는 기관에서 연락이 왔다.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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