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리포트, 한국이 위험하다] <5>보름 합숙: 쉽지 않은 재활의 길

#1

교회 운영 출소자 재활공동체

합숙생활하며 치유 ‘고난의 길’

광고판 부착ㆍ이삿짐센터…

“땀 흘려 번 돈 아내에게 줄 거야”

#2

“일상이 공동체 안에 있어야 돼

개인 의지로는 유혹 못 이겨…

가족ㆍ고향 생각 절실하지만

끊을 때까지 악착같이 버텨야죠”

#3

보호관찰소에 가면 화만 나

인간말종으로 보는 분위기만…

“니코틴ㆍ알코올 중독처럼

우리도 환자로 봐줬으면 좋겠다”

마약의 유혹을 이기기 위해 땀 흘려 일하는 재활공동체 구성원들. 이삿짐센터에 취직한 이채성(왼쪽)씨와 박진규씨가 함께 짐을 옮기고 있다. 박재현기자

“지금도 필로폰이라는 말만 들으면 몸이 먼저 반응해. 스스로 끊었다는 사람들 앞에 주사기 가져다 놓으면 벌벌 떨면서 주사기를 바로 꽂을 거야. 이건 절대 끊을 수 없어.”

일주일 만에 말도 없이 떠난 동료를 탓하기보다 감쌌다. 그 심정 이해한다는 투였다. 재활공동체에서 땀 흘려 일하면서 사회에 어엿하게 복귀할 날을,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살 그날을 손꼽아 기다린다던 그조차 잠시 눈치를 살폈다.

“아니, 당신은 10년이나 끊어오지 않았느냐”고 되물었다. 고지가 저긴데, 걱정할 게 있냐는 바람을 담아서 그의 답을 기다렸다. 그는 중얼거렸다. “아주 지독한 저주 같은 거야.” 곁에 있던 동료가 거들었다. “필로폰의 끝은 자살이라는 말이 있어. 죽지 않는 이상 못 끊는다는 거야. 하나님이 주신 가장 큰 형벌이라고.”

그들은 그렇게 ‘절대 끊을 수 없는’, ‘가장 큰 형벌’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 자리에 최근 한국일보 기자가 비집고 들어갔다. 마약 중독을 벗어나 경제적으로 자립하려는 이들이 서로를 의지하는 재활공동체에서 함께 먹고 자기도 하며 보름을 보냈다. 편견의 더께를 조금이나마 벗겨내고 그들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싶었다.

그들은 그저 인생의 낙오자거나 피해야 할 범죄자일뿐인가, 다시 우리와 어울려 사는 방법은 없는 건가, 재활은 어떻게 이뤄지는 것인가, 재활을 막는 장애물은 무엇인가, 수많은 질문을 안고 그들과 호흡했다. 보름이라는 짧은 시간이 명징한 답을 주진 않았다. 다만 그들과 현재까지도 지속적으로 연락을 취하며 변화된 모습을 살펴보고 있다. 그 끝이 성공일지, 실패일지는 장담할 수 없다.

어쩌면 그들은 매일 업보처럼 신화 속 시지프스의 돌을 밀어 올리고 있는 건지 모른다. 돌의 무게는 그들 스스로 만든 것이다. 인천 구월동 ‘소망을 나누는 사람들 교회’가 2001년부터 운영하는 출소자 재활공동체가 기록의 무대다. 마약류 투약 경험이 있는 신용원(53) 목사가 공동체를 이끌고, 진선규(59) 목사가 돕고 있다. 기자가 ‘나’로 등장하는 1인칭 시점으로, 신 목사를 제외한 공동체 일원은 가명을 썼고, 정확한 날짜는 적지 않았다.

1일차: 독한 마음 먹고 합숙 시작

“마약 하다가 최근 출소한 지인이 있어요. 그 사람도 이곳에 머물게 하고 싶은데 가능해요?”

김용훈(43)씨가 교회 사무실에서 물었다. 신 목사가 답했다. “지금은 못 받아. 조금이라도 의지가 약한 사람들이 있으면 다 물들어. 용훈씨도 고향 내려갈 생각하지 말고 여기 있어. 내려가면 바로 마약 생각날 거야.”

신 목사가 이것저것 설명했다. “중독자를 치유하기 위한 신앙공동체다. 중독자에게 일자리 마련 등 재활을 돕고, 그들과 가족들을 불러 예배하고 대화하며 치유하려고 한다. 매주 교회에 모여 서로의 절망과 희망을 공유하는 건 필수 행사다. 단약(마약을 끊는 것)을 굳게 결심한 사람들은 교회 인근에 마련된 숙소에서 정해진 일정에 맞춰 합숙 생활을 한다.” 신 목사 역시 마약을 경험했지만 신앙으로 단약에 성공한 사람이다.

용훈씨는 교회 근처 공동체 직업센터인 ‘야긴&보야스’ 사무실로 이동했다. 이 회사는 유동인구가 많은 버스정류장에 영상광고판을 부착해 광고비를 받고 있다. 투약자 5명이 근무하고 있고, 용훈씨도 이곳에서 일하면서 급여를 받게 된다.

오후 8시쯤 용훈씨는 예배에 참석했다. 참석 인원은 총 7명. 일부 투약자 가족들을 제외하면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가 ‘마약’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2시간 가까이 이어진 예배와 친목도모 시간이 끝나자 용훈씨는 공동체 최동운 이사와 인근 공원을 찾았다.

시계는 오후 10시를 가리켰지만, 둘은 40분간 쉬지 않고 달렸다. 최 이사가 속 깊은 이야기를 꺼냈다. “나 있잖아. 장모님 생신잔치 때도 옷 갈아 입으러 다녀온다면서 마약하고 들어갔어. 그때 큰 애는 틱(tic) 장애, 작은 애는 자폐증이었어. 가족이 병든 건 내 탓이야.” 용훈씨는 묵묵부답이었다.

최 이사가 말을 이어갔다. “그러다가 내가 회복되니 가족들도 달라졌어. 큰 애도 작은 애도 장애가 없어졌어. 아내도 마음의 상처가 조금씩 치유되고 있어. 그렇게 극복해가는 거야.” 용훈씨는 여전히 멍한 표정이었다.

부끄러운 과거를 털어놓으며 아픔을 공유하고자 하는 최 이사의 의도를 모르는 걸까. 용훈씨가 잠을 청하자 최 이사가 내게 말했다. “용훈씨 같은 투약자가 이곳까지 스스로 찾아왔다는 건 굳은 결심을 한 겁니다. 그런데 단약이 말처럼 쉽지 않죠. 유혹을 못 이겨서 공동체 생활을 포기하고 돌아가는 경우도 많아요.” 나는 걱정됐다. ‘용훈씨가 공동체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2일차: 누가 찾아왔다

오후 7시쯤 매주 한 번 열리는 공동체 모임. 중년 여성이 눈에 띄었다. 처음 이곳을 찾았다고 했다. 신 목사를 중심으로 11명이 사무실에 둘러 앉아 ‘기다림’을 주제로 발언을 이어갔다. 중년 여성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스무 살 된 제 딸이 필로폰에 중독돼 정신병원과 집을 오가며 치료를 받고 있어요.” 특히 치료를 받고 있는데도 집 안에서 혼자 멍하니 망상에 빠지거나 폭력적 언행을 한다고 말할 때는 울음을 터뜨렸다.

듣고 있던 사람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들도 대부분 마약을 했던 사람들이다. “마약에서 벗어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딱 하나예요. 일상이 공동체 생활 안에 있어야 벗어날 수 있어요.” 합숙 이후 조용하던 용훈씨도 한마디 거들었다. “멍하니 망상에 빠진 건 마약을 해서 그럴 수도 있어요”

중년 여성은 2시간 넘게 딸 상황을 설명했고, 나머지 10명은 자신들의 경험담을 토대로 조언을 건넸다. “우리가 볼 땐 저 딸의 중독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해 보여요.” “그래도 이곳까지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는 엄마를 뒀으니 딸이 극복할 가능성은 충분해 보여요.” 그 가능성이 현실이 되길 바라며 잠이 들었다.

김용훈(왼쪽 두 번째)씨가 재활공동체 관계자들과 버스정류장 영상광고판 교체 작업을 하고 있다. 박재현 기자

4일차: 사랑하니까 멀어진 가족

용훈씨와 숙소에서 김치와 두부, 라면으로 아침을 대충 때웠다. 우리가 머무는 숙소는 16㎡, 10㎡ 남짓 방 두 개가 전부. 큰 방은 진 목사가 쓰고, 작은 방은 숙소생활이 필요한 출소자들이 사용한다.

용훈씨는 오전 일찍 시내도로로 나가 가판대를 철거하고 디지털 광고판이 달린 새 가판대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전기 설비는 다른 사람에게 맡길 테니 용훈씨는 전동 드릴로 가판대 나사를 풀어줘요.” 작업을 지시하는 최 이사 말을 용훈씨는 잘 따랐다. 처음엔 낯가림이 심했지만, 일이 익숙해지자 한결 편해 보였다.

그리고 입을 열고 과거를 고백했다. “필로폰으로 걸린 게 7번쯤 될 걸. 징역 산 기간만 4년이야. 20, 30대 땐 마약이라면 악마에게 내 인생을 바칠 수도 있을 것 같았지.” 최근까지 징역을 살다 나온 용훈씨는 아내와 가족이 있는 부산에 가고 싶지만 아직은 갈 수 없다고 했다.

“빨리 가고 싶지. 근데 ‘네 죄에서 자유로워지지 않으면 절대 가족들 옆에 갈 수 없다. 가족에게 상처만 커진다’는 신 목사님 말에 우선 홀로 자립하려고 여기에 온 거야.” 마약을 끊으려는 사람에겐 환경이 가장 중요한 법. 부산에 가면 어울리는 사람들이 죄다 마약을 하는 사람이라 타지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게 더 낫다고 했다. 그가 가족과 멀리 떨어져 있는 이유는 바로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6일차: 땀 흘려 버는 기쁨이 먼저다

새벽부터 부산했다. 마약에서 벗어나 번듯한 일거리를 찾기 위해 공동체에 들어온 박진규(42)씨와 이채성(42)씨 얼굴이 밝다. 아침부터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둘은 공동체 생활을 하며 단약한지 각 10년, 3년째다.

“이 일 시작한 지 사흘 밖에 안 됐는데 몸이 말이 아니네. 그래도 이제껏 날 기다려 준 고마운 아내 생각해서 정신차려야지.” 10년째 단약 중인 진규씨는 부인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마약만 하지 말고 다니라’고 입버릇처럼 말해온 부인 생각에 박씨는 공동체에서 주선해준 이삿짐센터에 취직했다. “내가 빨리 땀을 흘려 번 돈을 아내에게 가져다 줘야 해.” 그의 입에선 대부분 부인과 열아홉 살 된 딸 이야기만 나왔다.

진규씨가 일하는 도중에 채성씨를 탓했다. 채성씨가 일을 게을리한다는 이유였다. “이래선 우리 대접 못 받아. 이거라도 열심히 안 하면 뭐 하고 살 거야.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인식하겠어?” 진규씨 말에 채성씨가 화를 내면서 멱살잡이로까지 이어졌다. 두 사람을 간신히 뜯어 말렸지만 분위기는 차갑게 식었다.

그래도 진 목사는 둘을 바라보며 흡족해 했다. “땀 흘려 돈을 버는 건 재활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어요.” 진 목사 역시 마약 투약자였다. 경찰 출신 아버지 밑에서 유복하게 자랐지만 젊은 시절 조직폭력배와 어울려 서울 강남에서 유흥업소를 운영하며 흥청망청 돈을 쓰다가 우연히 마약에 손을 댔다. 필로폰을 비롯해 온갖 종류를 다 섭렵했다고 한다. 마약에 빠져 일상이 망가지니 쉽게 번 돈이 사라지는 건 ‘쏜 살’ 같았다고 한다. 돈도 잃고 사람도 잃고 가족마저 떠나자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하기도 했다.

“제대로 살아보려고 발버둥 쳤지만 일해서 돈 벌기가 쉽지 않았죠. 결국 쉽게 돈을 벌기 위해 필로폰 판매까지 손을 뻗었죠. 노동을 통해 돈을 버는 기쁨을 깨닫지 못하면 이런 굴레를 벗어날 수가 없어요.” 진 목사는 재활의 근간은 노동과 직장이라고 다시 한번 말했다.

7일차: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점심 무렵 용훈씨가 갑자기 나를 찾았다. “지금 어디야? 오는데 오래 걸려도 좋으니 점심 같이 먹자.” 평소 같지 않은 흥분된 목소리였다. 차로 30분이 걸려 용훈씨가 있는 순대국밥 집에 도착했다. 왠지 불길했다. 용훈씨는 소주 한 병을 이미 비웠다. 국밥은 밥알이 퉁퉁 불어 있을 정도로 한 숟가락도 뜨지 않았다. “마약 하면 가장 흔한 증상이 밥 못 먹는다. 식욕이 아예 없어진다.” 합숙생활을 시작하면서 신 목사가 해준 말이 떠올랐다.

용훈씨는 나를 보자마자 인사도 거른 채 마구 말을 쏟아냈다.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내가 이런 대접 받으며 살 사람이 아니야. 지각 좀 했다고 화를 낼 수 있는 거야?” 일을 하다가 아마 관리자랑 다툰 모양이었다. “제발 진정해봐요.” 그랬더니 대뜸 마약 이야기를 꺼냈다. “나랑 어디 좀 가자. 그거 한번 해볼래?” “뭘 해봐요” “알잖아. 그거. 지금 당장 내가 구할 수 있어.”

그를 향해 버럭 화를 내면서 거듭 진정하라고 말했다. 그는 멍하니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여기 도저히 못 있겠다. 나 부산 간다.” 그는 이 말을 남기고 곧장 자리를 떴다. 용훈씨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뒤로도 보지 못 했다.

이날 숙소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저마다 용훈씨의 이탈을 아쉬워했다. “지독한 저주”라고 했다. 용훈씨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소망을 나누는 사람들 교회에서 마약을 끊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한 숙소 모습. 16㎡, 10㎡ 남짓 방 두 개가 전부다. 박재현 기자

10일차: 감방 가면 복 받은 거다

“왜 꾸물거려요. 좋은 말 할 때 빨리 소변검사 끝내고 가요!”

“공무원이면 답니까? 왜 다짜고짜 화를 내요. 범죄자 취급하는 거야?”

채성씨와 함께 찾아간 인천의 한 보호관찰소에서 고성이 오갔다. 마약투약 혐의로 법원에서 보호관찰을 명령 받은 채성씨가 소변검사를 받기 위해 간 자리다. 이날 보호관찰소를 찾은 남성은 20여명 정도.

씩씩거리면서 사무실에서 나온 채성씨가 내게 말했다. “소변검사를 얼마나 자주하는 거냐고 물었을 뿐인데, 쳐다보지도 않고 손을 휘젓기만 하네.” 귀찮다는 식으로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 화가 잔뜩 났던 거다. “말은 보호관찰인데, 실상은 범죄자 감시야. ‘너는 ‘뽕쟁이’니까 부르면 잔말 말고 소변검사 받으러 와라’ 이런 식인거지. 치료를 돕거나 사회로 복귀하는데 필요한 교육은 없고 무작정 감시만 하는 거야.”

흥분한 목소리는 신세한탄으로 변했다. “우리끼리는 감방 가면 차라리 복 받은 거라는 말까지 해. 마약 중독됐을 뿐인데, 사람 때리고 괴롭히고 잔인하게 죽인 사람보다 우릴 더 비하하잖아.” 채성씨는 소변검사 받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서는 침착을 되찾았다. “자기 합리화하자는 게 아니야. 마약이나 하는 ‘인간 말종’으로 보는 분위기가 퍼져 있다 보니 마약을 다시 찾는 사람들이 많은 거야.”

채성씨는 “정부에서 우리 같은 사람에게 최소한의 도움의 손길이라도 뻗어줬으면 좋겠는데 교회나 자선기관 아니고선 관심도 없다”고 했다. ‘정부에서 뭘 해줬으면 좋겠냐’고 묻자, 그가 말했다. “처벌에만 치중하지 말고 우리를 환자로 봐줬으면 좋겠다. 금연이나 알코올중독 치료센터처럼 말이다.” 그의 기대 수준이 높은 걸까. 정부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13일차: 중독 부부의 소망

“누구나 선입견이란 건 있죠. 그런데 지내다 보니 보통 사람들과 다를 게 없어요. 그걸 깨닫는 계기가 없었을 뿐입니다.”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주고 있는 이삿짐센터업체 사장 정성훈(47)씨와 부인 옥정희(40)씨를 공동체 사무실에서 만났다. 마약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게 꺼려지지 않느냐는 질문에, 성훈씨는 “일종의 투자”라고 답했다. 뜻밖이었다. “이분들의 의지에 투자를 하는 거죠. 지금껏 지켜보니 다른 직원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어요. 제 돈을 허투루 쓰는 게 아닙니다.”

성훈씨는 스스로 담배 중독자라고 말했다. “담배가 법으로 금지돼 있었으면 저는 지금쯤 이분들이랑 똑같은 범법자가 됐을 거예요. 그게 합법이냐 불법이냐 차이죠. 이슬람이나 일부 동남아국가에선 술 마시면 태형까지 받곤 하잖아요.”

성훈씨가 마약중독자들을 편견 없이 바라보게 된 이유는 또 있다. 정희씨와 결혼하면서다. 정희씨는 5번이나 법의 심판을 받은 마약중독자였다. 성훈씨는 처음에는 정희씨의 과거를 알지 못했다고 한다. 정희씨는 “남편이 뒤늦게 제가 마약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그건 과거일 뿐 지금 모습은 다른 사람들과 다를 게 없다는 걸 알게 됐다고 해요.”

성훈씨는 방송이나 영화에서 마약투약자를 정신병자나 살인마처럼 묘사하고 있는 것도 걱정했다. “마약에 중독돼 치료가 필요한 사람인데 가둬놓기만 하면 병이 나을까요? 소속감과 자존감을 찾을 수 있게 일자리를 지원해주는 일이 먼저 병행돼야 합니다.”

15일차, 공동체를 떠나는 마지막 날은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다들 일터로 나섰고, 마약 이야기만 나오면 여전히 두려워했다. 용훈씨 일은 이미 잊혀졌다. 누군가 내 손을 꼭 잡고 이렇게 말했다. “편견을 거둬달라. 그리고 우리를 잊지 말아달라.” 반드시 재활에 성공하겠다는 다짐보다 더 무겁게 다가온 짧은 한마디였다.

김현빈 기자 hbkim@hankookilbo.com

박재현 기자 remake@hankookilbo.com 



http://www.hankookilbo.com/v/f1d07ee27afa47fb86cca9af9077c1cb

+ Recent posts